도둑 맞은 가난

디자인:

김여호

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.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.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해 본 일이었다.
그들의 빛나는 학력,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더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.
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.

박완서의 『도둑맞은 가난』 中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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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가난 까지 빼앗겼다" 라는 말이 당신에게 주는 충격은 얼마한가?
나는 무력감을 느꼈다. 문장을 씹으며 읽을 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무력함을 말이다.
박완서의 『도둑맞은 가난』 은 배금주의 사회에서 허위 의식이 끼치는 해독과 그로 인한 절망을 보여 주고 있다.
가난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이나, 부자이면서 가난의 경험마저 탐내는 인간 모두 염치없는 허영을 부리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나약함, 그리고 허탈함과 비열함 까지 적나라하게 고발한다.